2015 개정, 고등영어2, 다락원 김길중, 3과 본문 해석 음원 mp3,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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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정_고등학교영어II_3.mp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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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ld Imagination - People Far Ahead of Their Time

People Far Ahead of Their Time

시대를 앞서간 사람들

 

Pythagoras and Music

피타고라스와 음악

 

Along with the pleasant smells of fresh fruit and bread was the constant smell of hay and manure from livestock.

신선한 과일과 빵의 기분 좋은 냄새와 함께 건초와 가축의 거름 냄새가 끊임없이 났습니다.

 

So many people and animals were gathered in one place with such strong smells.

아주 많은 사람들과 동물들이 그러한 지독한 냄새와 함께 한곳에 모여 있었습니다.

 

But more invasive than the smells was the constant noise of voices competing to be heard.

그러나 냄새보다 침투적인 것은 들리기 위해 경쟁하는 끊임없는 말소리였습니다.

 

Merchants and shoppers argued over prices.

물건을 파는 사람들과 사는 사람들은 가격을 두고 논쟁했습니다.

 

Coins jingled.

동전은 딸랑댔습니다.

 

Animals made sounds, servants chatted, and children cried for their lunches.

동물들은 소음을 만들어 내고, 하인들은 잡담을 늘어놓았으며, 아이들은 점심을 달라며 울어 댔습니다.

 

It would have been hard for Pythagoras to hear music in all that din, but according to legend, that is exactly what happened.

피타고라스가 이런 모든 소음 속에서 음악을 듣기란 힘들었을 테지만,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바로 일이 일어났습니다.

 

Through all the normal noises of a busy ancient market, Pythagoras heard the hammering of a blacksmith.

분주한 고대 시장의 모든 일상적인 소음을 통과하여 피타고라스는 대장장이의 망치질 소리를 들었습니다.

 

Instead of the noise that everyone else heard but ignored, he heard music.

다른 모든 사람이 듣고 무시하는 소음 대신, 그는 음악을 들었습니다.

 

The blacksmith's hammer was producing sounds that were pleasing to his ear.

대장장이의 망치질은 그의 귀를 기쁘게 하는 소리를 만들어 내고 있었습니다.

 

In constant pursuit of knowledge, Pythagoras stepped inside the blacksmith's shop.

끊임없이 지식을 추구하면서, 피타고라스는 대장장이의 가게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From the blacksmith, Pythagoras learned that his hammers weighed six, eight, nine, and twelve pounds.

대장장이로부터 피타고라스는 그의 망치가 6파운드, 8파운드, 9파운드, 그리고 12파운드의 무게가 나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When they came down upon the iron, each of them produced different sounds.

망치가 철을 내려칠 각각의 망치는 서로 다른 소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Pounded at the same time, the hammers produced a musical consonance.

동시에 내려쳐질 망치는 음악적 화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Pythagoras began experimenting on a monochord, an ancient musical instrument with only one string.

피타고라스는 현이 하나뿐인 고대 악기 일현금으로 실험을 시작했습니다.

 

Pressing on the string at certain positions produced specific notes.

어떤 위치에서 현을 누르면 특정한 음이 났습니다.

 

By experimenting with the positions, he developed the theory of musical ratios, which was the first scale in history based completely on mathematics.

여러 위치로 실험함으로써 그는 음악적 비율(음률)이라는 이론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전적으로 수학에 기반을 역사상 최초의 음계였습니다.

 

It was Pythagoras who started cutting up strings to work out the mathematical ratios governing harmony.

화성을 좌우하는 수학적인 비율을 만들어 내기 위해 현을 자르기 시작한 것이 바로 피타고라스였습니다.

 

Over the course of time, most of the Western world has come to use his eight-note scale: do, re, mi, fa, so, la, ti, do.

시간이 흐르면서 서구 세계의 대부분은 , , , , , , , 도로 이루어지는 그의 8음계를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Using Pythagoras's ratios, musicians can transpose music from one key to another.

피타고라스의 비율을 이용해서 음악가들은 조에서 다른 조로 음악을 조옮김할 있습니다.

 

Furthermore, musicians can determine whether two notes sound good together by calculating their mathematical ratio.

게다가, 음악가들은 수학적 비율을 계산함으로써 개의 음이 함께 좋은 소리를 내는지를 결정할 있습니다.

 

What can you take from this anecdote?

일화로부터 여러분이 얻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The next time you hear a pleasing musical combination, you'll know that the ratio between the notes must be in whole numbers, mathematically speaking.

다음 번에 기분 좋은 음악의 조합을 듣는다면 여러분은 사이의 비율이 수학적으로 말해서 틀림없이 정수로 되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것입니다.

 

More importantly, Pythagoras thought of musical notes as numbers.

중요한 것은 피타고라스가 음을 숫자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Without him, the tuning system might have developed in a different way.

그가 없었다면, 조율 체계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되었을 것입니다.

 

The idea that a person did not need a musical instrument to write or hear music was revolutionary.

사람이 음악을 만들어 내거나 듣는 반드시 악기가 필요하지는 않다는 생각은 혁명적이었습니다.

 

For Pythagoras, the discovery was more than just musical.

피타고라스에게 발견은 단지 음악적인 이상이었습니다.

 

Music had order, and that order was mathematical.

음악은 질서를 가지고 있었고, 질서는 수학적이었습니다.

 

In his lifelong pursuit of truth, he came to believe that numbers had a hidden ability to explain the universe.

평생의 진리 탐구 과정에서, 그는 숫자가 우주를 설명하는 숨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믿게 되었습니다.

 

Merian, the Artist of Ecology

생태학의 예술가, 메리안

 

Maria Sibylla Merian was born into a family of artists and printers in Frankfurt in 1647.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은 1647년에 프랑크푸르트의 예술가이자 인쇄업자 집안에서 태어났습니다.

 

As a young girl, she painted flowers before she developed a passion for caterpillars, which go through a change in forms called metamorphosis.

어린 소녀 시절, 그녀는 꽃을 그리다가 애벌레에 대한 열정을 키우게 되었는데, 애벌레는 변태라고 불리는 형태상의 변화를 겪습니다.

 

She was fascinated to see caterpillars become moths and butterflies.

그녀는 애벌레가 나방과 나비가 되는 것을 보는 매료되었습니다.

 

At the age of 13, silkworms captured Merian's attention.

열세 살이 되었을 , 누에가 메리안의 관심을 사로잡았습니다.

 

Later, her interest grew wider and deeper.

, 그녀의 관심은 넓고 깊어졌습니다.

 

She would watch caterpillars, pupae, butterflies, and moths for months.

그녀는 동안 애벌레와 번데기, 나비, 나방을 관찰하곤 했습니다.

 

By painting with a brush, Merian recorded each stage of their life cycles, noting every change and movement: silkworm moths developing from eggs to larvae and then to cocoons before reaching their adulthood.

붓으로 그림을 그림으로써 메리안은 그들의 생명 주기 단계를 기록했고, 모든 변화와 움직임을 기록해 두었습니다. 누에나방이 알에서 유충이 되고, 그런 다음 성충이 되기 전에 고치로 발달하는 것을 말입니다.

 

In 1679, she published The Wondrous Transformation of Caterpillars, the result of almost two decades of observations.

1679, 그녀는 거의 20년간의 관찰 결과인 애벌레의 놀라운 변신 출간했습니다.

 

It was unlike any other book ever written.

그것은 그때까지 쓰인 어느 책과도 달랐습니다.

 

There were other publications on insects, but no one had ever drawn their complete life cycles to show how they were connected to the other animals around them.

곤충에 관한 다른 출판물들이 있었지만, 누구도 곤충들이 그들의 주변에 있는 다른 동물들과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보여 주기 위해 전체 생명 주기를 그린 적은 없었습니다.

 

Instead of depicting insects as specimens set against a plain background, Merian showed the relationships between plants and animals.

아무것도 없는 배경에 놓인 표본으로 곤충을 묘사하는 대신, 메리안은 식물과 동물 사이의 관계를 보여 주었습니다.

 

At a time when other scientists were trying to make sense of the natural world by classifying plants and animals into narrow categories, Merian looked at their place in the wider natural world.

다른 과학자들이 식물과 동물을 편협한 범주에 넣어 분류함으로써 자연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있을 , 메리안은 넓은 자연계에서 그들의 위치를 바라보았습니다.

 

She searched for connections where others were looking for separation.

그녀는 다른 사람들이 단절성을 찾고 있던 곳에서 연관성을 찾았습니다.

 

In June 1699, Merian, at the age of 52, was determined to see exotic specimens in their natural habitats, so she headed to Surinam with her daughter.

1699 6, 52살의 메리안은 외국의 표본을 그들의 자연 서식지에서 보기로 결심했고, 그리하여 딸과 함께 수리남으로 향했습니다.

 

After two years of traveling, she returned to Amsterdam and published Metamorphosis of the Insects of Surinam in 1705.

2년간의 여행 이후, 그녀는 암스테르담으로 돌아와 1705 수리남 곤충들의 변태 출간했습니다.

 

Merian was a rare female naturalist in the male-dominated scientific world of the late seventeenth century.

메리안은 17세기 후반 남성 지배적인 과학계에서 보기 드문 여성 박물학자였습니다.

 

Moreover, she crossed the Atlantic Ocean on an exploration for entirely scientific purposes long before doing that became popular.

더욱이, 그녀는 순전히 과학적인 목적의 답사로 대서양을 건넜는데, 이는 그렇게 하는 것이 유행하기 훨씬 전이었습니다.

 

One of the pictures in that remarkable book shows a branch of a tree almost stripped of leaves by ants crawling up the stem.

놀라운 저서에 담긴 그림들 하나는 줄기를 타고 올라가는 개미에 의해 잎사귀가 거의 떨어진 나뭇가지를 보여 줍니다.

 

A few ants are attacking a small spider and a cockroach while a tarantula eats a hummingbird.

개미 마리는 작은 거미 하나와 바퀴벌레 하나를 공격하고 있고, 와중에 타란툴라 마리는 벌새를 잡아먹습니다.

 

Another tarantula is seen carrying an egg sac among various species of spiders.

다른 타란툴라는 다양한 종의 거미들 사이에서 주머니를 가져가는 것으로 보입니다.

 

This and other pictures show no paradise but battlefields.

이것과 다른 그림들은 천국이 아닌 전쟁터를 보여 줍니다.

 

What Merian saw in nature was a Darwinian struggle for survival.

메리안이 자연에서 것은 다윈설적인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습니다.

 

Actually, it was 150 years before Charles Darwin wrote On the Origin of Species.

사실, 이는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 집필하기 150 전이었습니다.

 

The naturalist Carl Linnaeus would later use her drawings to classify insects, and Germany's most celebrated poet, Goethe, praised Merian for her ability to move "between art and science, between nature observation and artistic intention."

박물학자 린네는 후에 그녀의 그림을 곤충을 분류하는 이용하곤 했고, 독일의 가장 저명한 시인인 괴테는 '미술과 과학 사이에서, 자연 관찰과 예술적 취지 사이에서' 움직이는 그녀의 능력을 두고 메리안을 극찬했습니다.

 

Names usually come after the fact.

이름(용어) 보통 사실 뒤에 오기 마련입니다.

 

Nevertheless, it is still wonderful that Merian depicted ecological communities with such devotion almost two centuries before the term ecology was invented in Germany.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에서 생태학이라는 용어가 탄생하기 거의 2세기 전에 메리안이 이러한 헌신으로 생태 공동체를 그려 것은 여전히 놀라운 일입니다.

 

Steve Jobs: Alone No Longer

스티브 잡스: 이상 혼자가 아니다

 

On January 30, 1986, shortly after he was forced out of his job at the company he founded and years before his return, Steve Jobs stepped into the entertainment world when he purchased an animation studio from George Lucas.

1986 1 30, 자신이 창업했던 회사에서의 일자리를 잃게 직후, 그리고 다시 돌아오기 한참 , 스티브 잡스는 조지 루카스로부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를 매입하면서 엔터테인먼트 계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While the studio's team had produced a few impressive animated shorts for marketing purposes, Jobs was most interested in the team's computer, a machine capable of generating complex graphic visualizations.

스튜디오 팀이 마케팅 목적으로 편의 인상적인 단편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동안, 잡스는 복잡한 그래픽 영상을 만들어 있는 기계인 팀의 컴퓨터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He thought, "If we can make cartoons showing a desk lamp moving up and down, then why not films two hours long?"

그는 "우리가 위아래로 움직이는 탁상용 스탠드의 모습을 보여 주는 만화를 만들 있다면, 시간짜리 영화는 되겠는가?"라고 생각했습니다.

 

In 1995, his studio released the world's first computer-animated feature film, Toy Story, and experienced commercial success.

1995, 그의 스튜디오는 세계 최초 컴퓨터 애니메이션 장편 영화인 토이 스토리 개봉했고, 상업적 성공을 경험했습니다.

 

Years later, when introducing a revolutionary piece of technology in March 2011, Jobs summarized his strategy this way, "It is in our company's DNA that technology alone is not enough.

세월이 흐른 , 2011 3 하나의 혁신적인 기술을 소개하면서 잡스는 그의 전략을 이렇게 요약했습니다. "기술 하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 우리 회사의 DNA 안에 있습니다.

 

It is technology married with liberal arts, married with the humanities, that yields us the results that make our heart sing."

우리의 가슴이 노래할 있도록 하는 결과를 만들어 주는 것은 바로 교양 학문과 결합된, 인문학과 결합된 기술입니다."

 

What set all of Jobs's companies apart was an insistence that computer scientists must work together with artists and designers and that the best ideas emerge from the intersection of technology and the humanities.

잡스의 회사 모두를 구분 지었던 것은 컴퓨터 과학자들이 반드시 예술가와 디자이너와 협업해야 한다는 주장과 최고의 아이디어는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서 나타난다는 주장이었습니다.

 

This faith in the liberal arts is rooted in Jobs's own autobiography.

교양 학문에 대한 이러한 믿음은 잡스 자신의 자서전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He famously dropped out of Reed College but continued to audit a class in calligraphy:

그는 알려진 대로 리드 칼리지(Reed College) 중퇴했지만, 서체 수업을 청강하기를 계속했습니다.

 

I learned about serif and sans-serif typefaces, about varying the amount of space between different letter combinations, about what makes great typography great.

저는 세리프체나 산세리프체에 대해 배웠고, 서로 다른 활자 조합 사이의 간격을 달리하는 것에 대해 배웠고, 무엇이 훌륭한 활자를 훌륭하게 만드는지에 대해 배웠습니다.

 

It was beautiful, historical, artistically subtle in a way that science can't capture, and I found it fascinating.

그것은 과학이 포착할 없는 방식으로 아름답고, 역사적이며, 예술적으로 미묘했으며, 저는 그것이 매혹적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None of this had even a hope of practical application in my life.

어느 것도 인생에서 실질적으로 적용될 것이라는 희망은 전혀 없었습니다.

 

But ten years later, when we were designing the first personal computer, it all came back to me.

하지만 10 , 우리가 번째 개인용 컴퓨터를 설계하고 있을 그것은 전부 내게로 돌아왔습니다.

 

And we designed it all into that computer.

그리고 우리는 모든 것을 컴퓨터 안에 넣어 설계했습니다.

 

It was the first computer with beautiful typography.

그것은 아름다운 활자를 가진 최초의 컴퓨터였습니다.

 

If I had never dropped in on that single course in college, that computer would never have had multiple typefaces or proportionally spaced fonts.

제가 대학에서 단일 과정을 듣지 않았다면, 컴퓨터에는 다양한 활자체나 균형 잡힌 간격을 지닌 서체가 결코 없었을 것입니다.

 

The emphasis on the unity of knowledge was a defining characteristic of Steve Jobs.

지식의 통합에 대한 강조는 스티브 잡스의 본질을 규정하는 특징이었습니다.

 

In an age of intellectual fragmentation, Jobs insisted that the best creations occurred when people from different fields were connected and when our distinct ways of seeing the world were brought to bear on a single problem.

지식이 파편화되는 시대에, 잡스는 최고의 창조가 서로 다른 분야의 사람들이 연결되고 세계를 바라보는 우리의 구별된 방식이 하나의 문제로 나아가도록 이끌릴 일어난다고 주장했습니다.

 

That is what happens when a calligrapher designs a computer font and when an animator strikes up a conversation with a programmer in the employee lounge.

그것은 서예가가 컴퓨터 서체를 디자인할 그리고 애니메이션 제작자가 직원 휴게실에서 프로그래머와 대화를 시작할 일어나는 것입니다.

 

The Latin crest at the animation studio says it all:

애니메이션 스튜디오에 있는 라틴어 문장(紋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Alienus Non Diutius. Alone no longer.

Alienus Non Diutius.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Posted by 최 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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